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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좌담] 히든챔피언의 비밀

2019.10.14

  • 발표자

    대학원장 외 7인

  • 일시

    2019-10-14 00:00

중앙일보가 창간 54주년을 맞아 독일·스웨덴·이스라엘에서 발견한 소재·부품·장비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강소기업)은 3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 분야에서 장시간 기술력을 축적하고, 꾸준한 혁신으로 경쟁기업과 격차를 벌리며, 이해관계자가 화합·타협했다는 점이다. 중앙일보 8일·9일·10일·11일 
독일(1307개)과 비교하면 한국(23개) 히든챔피언은 턱없이 적다.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히든챔피언을 육성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미래전략연구센터의 도움으로 기업혁신·경영전략 분야 전문가 8인을 한 자리에서 모아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 방안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히든 챔피언의 비밀’특별좌담에 참석한 8인의 석학. 그래픽=김주원 기자.

김원준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기술혁신정책위원회 위원장은 과거 한국 제조업이 일군 성공이 히든챔피언 탄생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전 = 문희철 기자.

이들은 일단 경제규모나 성장속도 대비 한국 히든챔피언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를 파헤쳤다. 한 마디로 ‘빠른 성공의 함정(fast success trap)’이 원인이었다.

김원준 과총 과학기술혁신정책위원장(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은 “한국 제조업은 빠른 추격자(fast-follower) 전략으로 선도자(first-mover) 그룹에 다가서는 과정에서 거대한 성공을 경험했다”며

“문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달라진 환경에서도 과거의 과도한 확신과 과거지향적 합리화에 빠져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히든챔피언 탄생을 저해한다. 빠른 추격자 전략은 혁신 비용·기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저렴하고 품질 좋은 국외 소재·부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굳이 핵심 기반 기술을 개발할 유인이 적다는 뜻이다.

또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융합이나 인공지능(AI) 등 최신 혁신을 구태여 먼저 도입할 이유도 부족해진다. 스콧 스턴 미국 MIT 경영대학원 교수가 “과거 한국 제조업의 ‘빠른 성공’이 이제는 혁신의 가치를 내재화하는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언급한 배경이다.

 

히든챔피언 육성 방안으로 '디지털변혁'을 강조한 스콧 스턴 미국 MIT 경영대학원 교수. 대전 = 문희철 기자.

히든챔피언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걸림돌도 지적했다. 일부 한국 기업은 빅데이터·인공지능(AI)·3차원인쇄 등 특정 기술만 습득하면 강소기업이 될 수 있다고 오해한다. 물론 특정 기술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기존의 가치창출·시장점유 방식(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게 핵심이다.

마누엘 트라덴버그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신기술 도입으로 감소하는 ‘비용’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며 “신기술 도입이 비즈니스모델·기업지배구조 등 기업 활동 전반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라”고 조언했다.

마누엘·스콧 교수는 대화 과정에서 히든챔피언 육성의 키워드는 디지털변혁(digital transform)이라는데 한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한국이 우위를 점한 반도체·자동차·철강·조선·화학 산업에서 시작하라”며 “해당 분야 소재·부품 기업이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응용해 디지털차·디지털철강·디지털조선 산업을 창출한다면, 상대적으로 손쉽게 히든챔피언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조언했다.

마누엘 트라덴버그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신기술 도입이 기업 활동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파악하라고 조언했다. 대전 = 문희철 기자.

국내외 전문가가 한국 부품 소재 산업의 경쟁력 강화 방안을 두고 토론하고 있다. 대전 = 문희철 기자.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산업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용석 미국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한국학프로그램 부소장은 “한국에서 AI와 같은 혁신을 도입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가 이직하기 어렵고, 일부 강성 노동조합이 일자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혁신에 저항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은 결국 관련 기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재 육성과 밀접하다. 스웨덴 금속베어링 기업 SKF에서 1907년 자동조심베어링을 개발한 것도 결국 보수담당 기술자 스벤 빙크스트였다. 중앙일보 10월 9일 4면

기술 인력을 육성할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외부에서 인재를 수혈하거나, 기존 인력을 재학습·재교육하는 방법이다. 외부 인재가 쉽게 이직하거나, 사내에서 부서 이동이 자유롭다면 새로운 기술적 역량을 갖춘 인재 확보·육성이 가능하다.

한국 노동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이용석 미국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한국학프로그램 부소장. 대전 = 문희철 기자.

폐쇄적인 한국 특유의 노동시장이 두 가지 방법 모두 가능하지 않게 한다. 전문가는 한국 노동시장이 유연하지 않아 이직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7년 차·중간관리자 이상이 되면

소위 ‘몸이 무거워진다’는 것도 문제다. 일부 노동조합은 근로자 재교육·재배치까지 노사합의 대상으로 삼아 신기술 도입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 이용석 부소장의 설명이다.

김원준 위원장은 “히든챔피언 육성의 전제는 사내·외 디지털변혁을 전담하는 ‘변혁특수팀’”이라며 “노동 시장 경직은 혁신을 전면에서 이끌 변혁특수팀 구성을 막아 히든챔피언 육성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이용석 부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한국도 매일 주차·출근 장소를 변경하지 않고 쉽게 이직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문화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맹탕 R&D 투자 달라져야

‘소재·부품 강국’ 독일의 플라스틱 소재기업 이구스(igus) 사례에서 확인한 것처럼 연구개발(R&D)과 히든챔피언은 불가분의 관계다. 중앙일보 10월 9일 5면

물론 한국 정부·기업 R&D 투자 금액(80조원)은 세계 5위 수준이다. 특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비중은 세계 1위다. 문제는 투자 대비 효율성이다.

제프 퍼먼 미국 보스턴대 경영대학 전략·혁신학과 교수는 미국 대학사례를 제시하며 R&D 다양성을 확보하면 효율도 개선한다고 일러줬다. 그는 “예컨대 조지아공과대학은 기술 개발에 특화했고, 텍사스A&M대학은 농업에 특화한다. 또 다른 대학은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기업이 제시한 기술을 최우선적으로 연구한다”며 “한국도 분야별 히든챔피언 기술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특화대학이 필요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한미 양국의 연구개발 효율성을 비교한 제프 퍼먼 미국 보스턴대 경영대학 전략·혁신학과 교수. 대전 = 문희철 기자.

대·중소 기업 간 격차는 논쟁거리였다. 이스라엘 국적의 마누엘 교수는 “이스라엘의 경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은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이 대규모 R&D를 투자하면서 고객과 접점을 확보해 제품을 알리고 판매한다면,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은 대기업의 혁신을 유도한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명확한 역할 분리는 히든챔피언의 조건인 ‘축적의 시간’을 제공한다. 축적의 시간은 혁신을 유도하고, 혁신 기업은 자본 투자를 이끌어 내며 히든챔피언으로 성장하는 선순환이 벌어진다는 설명이다.

윤혜진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조직대학원 교수는 “한국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공급자 역할에 그치면 히든챔피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며 스콧 교수와 함께 “기존 산업 구조의 가치를 확장하고 디지털번혁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중소기업을 히든챔피언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윤혜진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조직대학원 교수는 히든챔피언의 자격으로 디지털변혁을 선구하는 중소기업을 꼽았다. 대전 = 문희철 기자.

정부 주도 깜깜이 투자는 위험


알렉스 코드 페루 교황청가톨릭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글로벌 가치사슬의 이점을 누리지 못하면 히든챔피언 육성 가능성도 낮아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전 = 문희철 기자.

소재·부품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는 대통령 직속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원회를 가동하고 국회는 관련 법안을 마련했다.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일부 분야를 국산화하는 정책·전략은 필요하다.

하지만 국산화라는 구호에 매몰되면 오히려 히든챔피언 육성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특히 최근 한·일 갈등 때문에 글로벌 공급망을 파괴하는 행위는 “한국도 손해 보는 것”이라고 8인은 일제히 지적했다.

김인송 MIT 정치학과 교수는 “삼성전자가 일본산 폴리이미드를 사용해서 만든 반도체를 일본산 TV에 넣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며 “직접 생산하는 경우보다 저렴하고 효율적이라는 ‘비교우위’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런 국제적 분업을 중단하면 전체적 생산비용이 증가하고 이 과정에서 전문성을 갖춘 미래의 히든챔피언이 고사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국제적 분업이 유발하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김인송 미국 MIT 정치학과 교수. 대전 = 문희철 기자.

성급한 국산화는 제품·기술 혁신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알렉스 코드 페루 교황청가톨릭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비용경쟁력이 부족한 부품·소재를 모두 국산화하는 행위는 글로벌 가치사슬의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라며 “히든챔피언 육성 기회도 덩달아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마누엘 교수도 “보이지도 않는 수천만개 부품이 각자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추고 품질을 극대화할 때 전체 시스템이 발전한다”며 “새로운 히든챔피언도 이러한 효율적인 프로세스 안에서 탄생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최준호·이동현·김영주·박민제·문희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