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윤태성교수-거대도시 재난 대처하는 ‘집단 지성’
2014.03.18
By.관리자
도쿄역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유락조`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일본 최고 쇼핑가인 긴자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금년 1월 3일 아침, 새해 연휴를 맞아 쇼핑객으로 붐비는 유락조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유락조 전철역 선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파친코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주변 도로가 좁고 많은 소방차가 한꺼번에 들어설 공간이 없어서 화재 진압에 12시간이 걸렸다.
이 화재로 주변에 있는 백화점에서는 연초 황금 시즌에 영업을 못 하게 되었다. 화재 시에 발생한 연기와 냄새가 백화점 내부에 가득 진열되어 있던 의류 제품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백화점이 추수감사절에 최대 매출을 올린다면 일본 백화점은 연초에 최대 매출을 올린다. 그런데 올해에는 판매가 불가능해지면서 백화점들이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화재는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도쿄역을 기점으로 하는 신칸센 106본이 운행을 못 하게 돼 59만명에 대해 운송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남영역 선로 근처에서 작은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 영향으로 서울역을 기점으로 남행하는 모든 열차가 운행을 못 하게 된 꼴이다. 신칸센은 정시 출발과 정시 도착을 바탕으로 일본의 정밀한 사회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선로 주변에 있는 조그마한 파친코에서 발생한 작은 화재가 신칸센을 멈추게 하였다. 신칸센 운영자가 아무리 철저하게 리스크 관리를 하더라도 여기까지는 예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락조 화재는 거대 도시의 리스크 관리에 많은 과제를 노출하였다. 도시 기능이 의외로 쉽게 마비될 수 있으며 이를 미리 예측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도시 기능을 마비시키는 요인으로는 폭우, 폭설, 태풍, 한파, 화재, 지진, 파업, 시위 등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을 모두 예상하고 완벽한 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제는 리스크 관리를 위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관련 부서 담당자나 전문가 몇 명이 모여서 위원회를 구성하거나 의논하여 리스크를 분석하고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도시가 거대해지고 기능이 복잡해지면서 몇 사람 지식만으로는 리스크 요인을 예상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모든 관계자와 시민이 함께 지식을 모으는 방식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여기에 참고할 만한 사례로 일본 플래티나 구상 네트워크가 있다. 이 모임에는 대학과 지방정부는 물론 기업까지 참가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한 지식을 모으고 있다.
지식은 반드시 매뉴얼 형태로 표현되는 것만은 아니다. 지식은 시민을 포함한 관계자 머릿속에 암묵적인 형태로 들어 있으면서 도시 기능을 해칠 만한 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할 수 있다. 지방정부 기능은 이러한 지식을 널리 수집하고 시민과 공유하며 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났을 때 매뉴얼 사회의 한계라는 비판이 있었다. 미리 리스크 요인을 예상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정해둔 것이 매뉴얼이다. 그런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상황이 벌어지면 매뉴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의 리스크 관리에는 물론 매뉴얼도 필요하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모든 시민의 지식을 리스크 관리에 기초로 이용한다는 발상이다. 시민이 가진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도시 생존이 걸려 있다.